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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발 납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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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는 왜 협상하지 않았는가? == 이 사건에서 가장 오래 논쟁이 이어진 지점은 정부의 협상 거부다. 정부의 공식 입장은 일관되었다. 무장조직과 교섭하면 조직에 정치적 지위를 부여하게 되고, 수감자 석방에 응하면 사법 체계가 무력화되며, 무엇보다 다음 납치를 부른다는 것이다. 당시 서방 각국이 채택하고 있던 방침과도 부합했고, 실제로 사건 이후 요인 납치가 추가로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 방침을 옹호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이에 대한 비판은 세 갈래다. 첫째는 이익의 문제다. 뒤발이 추진하던 구상은 여당 내 강경파와 재계 일부에 불리한 것이었고, 그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그 구상을 소멸시켰다. 협상을 가장 강하게 반대한 인물들이 그 구상에 가장 반대하던 인물들과 상당 부분 겹친다는 지적이 사건 직후부터 제기되었다. 둘째는 수사의 문제다. 51일간 수도권에서 34만 건의 검문이 이루어졌음에도 은신처가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 3주차에 해당 지역을 지목한 제보가 수사에 반영되지 않았다. 이것이 수사 역량의 한계였는지 다른 요인이 작용한 것인지는 규명되지 않았다. 셋째는 비공식 경로의 문제다. 정부는 공식 교섭만 거부했다고 밝혔으나, 중재를 시도한 종교계와 정치권 인사들은 정부가 비공식 접촉조차 사실상 차단했다고 증언했다. 이 증언과 정부의 설명은 지금도 일치하지 않는다. 반론도 분명하다. 협상 거부는 사건 이틀째에 확정된 방침으로 뒤발의 서한이 도착하기 전이었으므로 그의 구상을 겨냥한 결정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 은신처가 지하실이었고 임차인 명의가 무관한 인물이었으므로 통상적 수색으로 발견하기 어려웠다는 것, 그리고 당시 접수된 제보가 하루 수천 건이었으므로 특정 제보의 미처리를 의도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위원회의 조사 범위가 군정기 정보기관의 국내 사찰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별도의 진상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협상 거부의 의사 결정 과정에 관한 기록은 공개되지 않았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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